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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의작가들/회화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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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소개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면(현 안좌면)에서 태어나 1933년 동경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 입학한 뒤 이듬해 ‘아방가르드’ 결성에 참여하고, 일본 모더니즘 계열 화가이던 후지다 쓰구지와 도고 세이지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1937년 동경 아마기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뒤 귀국하여 해방 후인 1948년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직을 맡고, 유영국 이규상 등과 더불어 ‘신사실파’를 창립하여 화신화랑에서 제1회 전시를 가졌다. 한국전쟁기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해군 종군화가로 참여하였으며, 1952년부터 55년까지는 홍익대학교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부터 59년까지 파리에 머물렀는데, 이 때 M. 베네지트 화랑과 앵스티튀 화랑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귀국 후 서울에서 잠시 활동하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비엔날레 한국대표로 참가(회화부분 명예상 수상)한 것을 계기로 이후 뉴욕에 정착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1970년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수상했고, 1973년
    뉴욕 포인덱스터 화랑에서  <하늘과 땅> <10만개의 점> 등 대작으로 제21회 개인전을, 이듬해에는 루이지애나 슈레브포트 반웰미술관에서 제22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가진 뒤 62세로 타계하였다.



    작가의 작품세계
     

    남도 서양화단 1세대에 속하면서 한국 근․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로서 동양의 자연관과 남도출신다운 풍부한 감성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회화세계를 펼쳤던 김환기(金煥基, 1913~74)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본래 신안 기좌도 출신으로 안좌국민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서울 중동중학을 중퇴하고 1927년 일본에 건너갔으니 실제로 고향에서의 생활은 13년여에 불과하다. 이 소년기 이외에는 줄곧 타지에 머물렀고 그의 활동 가운데서도 고향에 대한 별다른 연계가 보이지 않은데다 추상미술이라는 형식이 쉽게 어우러지지 못하는 지역 미술풍토 등으로 남도화단에서는 그의 대외적 위상에 걸맞는 자리매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감수성에 깊숙이 자리한 남도정서와 토속적 정취는 이후 작업의 근간을 이루며 그만의 독특한 문학적서정성으로 추상회화의 밑바탕을 이루게 된다.  


      그가 동경의 일본대학 미술학부와 연구과에서 본격적인 화업을 닦던 1932-37년 당시는 일본 근대미술에서 청년세대의 전위미술운동이 일기 시작하는 전환기였다. 그 동안 관동대지진과 잇따른 금융공황기 속에 한동안 위축되어 있던 기하학적 추상형식들이 되살아나면서 더욱 확대된 소재(오브제)도입과 구성으로 실험적 형식들이 번져가고 있었다. 김환기 역시 `34년부터 일본의 젊은 화우들과 [아카데미 아방가르드]를 조직하고 이미 다이쇼오(大正)시기부터 니카카이(二科會)를 중심으로 모더니즘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후지다 쓰쿠지(藤田嗣治) 도오고 세이지(東鄕靑兒) 등을 초빙하여 교습을 받기도 하였다. 실제 그가 `35년 [二科會]에 출품하였던 100호 대작 <종달새 울 때>만 해도 추상으로 변화과정인 듯 머리에 물동이를 인 한복여인의 단순조형방식에서 도오고의 입체파식 추상영향과 함께 문학적 향수를 살필 수 있다.


      1936년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갖고 이듬해 귀국한 뒤 서울화실에서 작업에만 전념하면서도 같은 해 창립된 [자유미술협회전] 등에 참여하여 일본 신미술운동 대열에 계속 참여한다. 당시 국내 화단은 이전의 외광파를 전형으로 인상파화풍을 더 확실히 하거나 야수파 같은 주관적 표현성이 강조되고는 있어도 추상이 전혀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건이 못  었다. 이 `30년대 후반의 <항공표지> <론도> <鄕> <창> <섬의 이야기> 등 일련의 작품들은 구상적 자연형상을 털어 버린 단순형태의 색면구성 위주로 당시 일본화단에서 모더니즘 형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던 1910년대 유럽의 기하학적 추상 또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계열에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감정과 내용 주관적 표현성의 개입을 완전 배제시킨 서구현지의 모더니즘 방식이나 일본작가들처럼 형식실험 자체에만 몰두하지는 않은 듯 여전히 자연 이미지가 단순화된 형태나 명제들 속에서 은근히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 김환기의 회화는 광복 이후 특히 1948년 국내 첫 추상미술단체인 [신사실파] 결성 이후부터 큰 변화를 보여 다시 자연형상을 회복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50년대는 그의 회화세계에서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일제시기 모더니즘에 심취하였던 그가 뒤늦게 조선백자에 매료되면서부터 비롯된 문화유산과 민속 등 민족전통에 대한 관심은 그들을 주된 소재로 삼아 표현형식의 새로운 모색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조선백자 석굴암 소슬대문 같은 소재들을 단순변형시켜 재구성하거나, 산수화 문인화 등 전통회화의 필선효과와 공간여백의 멋을 서구식 화구로 각색시켜 보기도 하고, 다리밟기 같은 민속 소재를 특유의 단순 조형방식으로 옮겨 내기도 한다. 그리고 `56년 프랑스로 떠나 3년 동안 2차대전 이후의 격변기에 휩싸여 있던 서구미술 현장의 움직임을 직접 접하게 된 뒤로 민족적이면서 현대적인 회화세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형상은 훨씬 단순해지면서 두터운 화면질감에 푸른색조를 주조색으로 달과 산 학 구름 같은 동양 자연주의의 초탈한 사유세계 쪽으로 옮겨가는 작업들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60년대, 브라질을 거쳐 미국에 정착하게 되는 `63년 이후 김환기의 작품은 재료와 형식은 서양화이되 그 정신세계와 감성만큼은 현대 동양화라 할만한 회화세계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의 자연에 대한 심상의 세계와 천성적인 시적 정취를 곁들여 서구 기하학적 추상이나 비정형 추상형식 또는 과도한 행위성 물질성과 다른 동양적 추상회화를 정립시켜내기에 이르른 것이다. 주로 <메아리>나 자연의 <소리>를 테마로 반점 같은 작은 붓자욱들을 연속시켜 이전의 단순색면 작업과는 또 다른 깊고도 투명한 공간성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이들 후기작품들은 ‘세계적이기에는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20세기 후반 들어 전혀 낯선 형식들로 급변을 거듭하고 있던 서구미술계와 부유하고 있는 당대의 문화현실 속에서 상대적으로 근원으로의 회귀, 이를테면 자기존재와 예술의 문화적 뿌리에 대한 탐구로 화제의 변화를 보여주는 예들이다. 파격의 표현형식과 매체, 개념들이 속속 등장하는 격변기 서구미술 현장에서 이전부터 천착해 온 동양적 사유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마치 문인화의 정신세계와도 같은 회화적 함축에 관심을 모아낸 것들이다. 궁극적으로는 동양회화 본래의 추상정신 체득과 그 현대적 변용의 가능성을 구체화시켜 가는 작업들로서 자연주의 시정이 짙게 묻어 나오던 이전 작품들과도 심성적 바탕이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는 회화세계의 탐닉이라 하겠다. 


    - 조인호. [남도미술의 숨결](2001. 다지리) 중 발췌



    연락처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 1길 23
    02-391-7701-2
    김환기|요코하마풍경|1935|
    김환기_요코하마풍경_1935_

    김환기|새|1955|
    김환기_새_1955_

    김환기|산|1958|
    김환기_산_1958_

    김환기|무제|1967|
    김환기_무제_1967_

    김환기|27-XI-72|1972|
    김환기_27-XI-72_197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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