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억과 심상, 고향 이야기; 화가 황영성 -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8-11-07 09:01 조회2,060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인류의 기억과 심상(心想), 고향 이야기 화가 황영성 - Ⅰ 백은하 (소설가) 화가 황영성은 194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광주남초등학교와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했다. 1956년 광주사범학교에 입학해 한국 앙포르멜 운동의 선구자인 화가 양수아를 스승으로 만나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1959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남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해 2년간 근무했다. 1961년 조선대학교 문리과대학 미술학과에 입학하면서, 평생의 스승인 임직순 교수를 만났다. 임직순 교수가 광주로 부임한 첫해였다.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 후, 1964년 복학했다. 교사발령을 받아 초등학교 교사를 겸하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1965년 2월 14일부터 일주일 동안 전남 영산포 ‘대흥당 찻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영산포 남초등학교 재직 중 가진 전람회로 주로 풍경을 소재로 한 유화 50여점을 전시했다. 1966년 조선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 조교로 근무한다. 제1기, 1970년대 이전의 탐색기 1967년 황영성은 두 명의 간호사를 그린 <병동의 오후>로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다. 흰색과 검은색 등 무채색을 주조로 한 작품이다. 그는 흰색과 검은색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회색조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전남도전 서양화부에서 수석상을 수상했다. 1968년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대학원을 졸업, 석사학위를 받는다. 1969년 광주 ‘Y살롱’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조선대 미술학과에서 전임강사로 강의를 시작한다. 1971년 국전에서 작품 <토방>으로 특선을 수상한다. 그 후 국전에서 6차례 특선, 7번 입선함으로써 중앙 화단에 공식적으로 데뷔하여 일관된 작업세계를 지닌 작가로서 기억된다. 1970년 김유임씨와 결혼했다. 1973년 제22회 국전에서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제2기, 1970년대, 회색시대 국전을 통해 화단에 데뷔할 무렵의 황영성의 화면은 ‘초가집’이라는 모티프에서 출발한 모노톤의 작품이다. 그의 가족에 대한 생각은 그리움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골목길 담 너머로 따뜻하게 비쳐오는 창문의 불빛에 그려진 가족들의 오붓한 모습을 그리워했다. 그의 화면에는 초가집 속에서 살아가는 농부와 아내, 어린아이들, 큰 눈의 소, 활개치는 닭과 개들, 그리고 초가지붕의 박 넝쿨 등 우리 고향과 가족 이야기를 그렸다. 1970년대의 작품들을 ‘회색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당시 ‘투명성이 가미된 뉘앙스의 찬 회색’이라는 평을 받았다. 화면의 소재는 ‘초가집’으로 집약될 수 있다.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보니 마을이 되었다. 황영성은 해외에서 전시회를 열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 세계가 확장된다. 그는 1979년 9월, 미국 뉴욕에 있는 ‘뉴욕한국문화센터’에서 ‘한국 서양화 6인 초대전’에 참가한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윤중식, 임직순, 최영림, 황규백, 홍종명 등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誌는 ‘서구식 현대미술 시장에 나타난 한국인들’이라는 표제로 전시회를 보도했다. 이 가운데 황영성을 ‘강한 조형 언어로써 시선을 사로잡으며 상쾌한 색채 감각에 의해 자연과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며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작가’ 라 평해 작품의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뉴욕 전시를 마치고 이어 영국,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스페인, 이태리 등 유럽을 돌아보았다. 황영성은 1980년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광주민주항쟁 직전 서울 롯데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옹기종기 모인 정겨운 마을 모습을 그린 회색톤의 <마을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70년대 작업을 정리한 전시회다. 제3기, 1980년대, 녹색시대 황영성은 1983년, 광주 ‘남도예술회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화면의 색채가 눈에 띄게 밝고 화려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회색이 간간이 비치기는 하지만 회색톤이 화면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회색톤의 <마을 이야기>가, 녹색톤의 <농경도>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 작품들은 ‘녹색시대’로 표현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소’ ‘소시장’ 등이 화면의 중요한 모티프로 부상한다. 1986년 서울 프레스센터 내에 위치한 ‘서울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백~3백호의 대작들이었다. 화면 가득 녹색톤의 <농경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넓은 들판, 생명감을 지닌 <농경도>의 뜨거운 활력이 전시장을 압도했다. <농경도>의 화면 분할 기법으로, ‘숲’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과 <가족 여행>등을 선보였다. 이 모든 화면의 모티프들은 우리의 일상적 환경과 삶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90년대로 접어드는 제4기로 이어진다. 황영성의 회화가 성숙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몽골리안 루트, 2차 미술 여행 1990년대 황영성의 해외 나들이가 시작된다. 알래스카에서 멕시코를 거쳐 페루까지 이어지는 아메리카 몽고리안 루트를 따라 이동하는 여행이다. 그는 캐나다와 미국의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 멕시코 과테말라의 마야 아즈텍 문화, 페루의 잉카문화권을 돌아보았다. 이 여행은 화가에게 다양한 체험의 시간이었으며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다. 그는 뉴욕을 거쳐 파리를 경유하게 되는데 파리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아 약 2년간 머무르며 작업한다. 이는 동시에 파리 화단과의 연결을 의미한다. 파리에서 1991년과 1992년, 두 번의 초대전을 갖게 된다. 1991년 프랑스 앙제의 ‘라틀리에’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살롱 도톤느’ 특별 초대전에 출품했다. 또한 모나코에서 열린 제25회 몬테카를로 국제회화제에서 특별상인 ‘아빕가르구르 상’을 수상했다. 1992년 파리 ‘베르넴 준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는 본격적으로 파리 화단 진출을 시도한 첫 무대이다. ‘베르넴 준 화랑’은 고흐의 첫 개인전을 열었던 곳이며, 르느와르를 비롯한 인상화 화가들과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 등이 전람회를 열었던 2백년 전통의 유서 깊은 화랑이다. 그는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를 여행하면서 또 다른 수많은 가족들을 만났다. 사람들 뿐 아니라 나무들, 꽃, 뱀, 물고기, 야생의 동물, 물과 바람까지 가족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가 만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그의 그림 속으로 모여든다. 하나의 지구촌 가족으로, 우주 가족으로 서로 어울렸다. <가족이야기>가 그의 그림이야기이다. <가족이야기>에서는 다양한 색감을 화려하게 사용했다. 황영성은 1993년 금호미술상을 수상한다. (계속)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