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채화의 거장 배동신의 작품세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8-12-11 18:59 조회2,772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한국 수채화의 거장 수채화가 배동신의 작품 세계 백은하 (소설가) 서양화가 배동신(裵東信)은 1920년 6월 16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출생했다.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 벌교초등학교로, 다시 여수 서초등학교로 옮겨 수학했다. 1936년 그림을 그리러 간 금강산에서 박수근(朴壽根)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았다. 평양의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 장식부에서 일하며 문학수(文學洙), 장리석(張利錫)과 교류했다. 1937년 ‘일본소화의전’에 재학 중인 이경석의 도움으로 동경으로 건너갔다. 1939년 일본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에 입학했다. 동경에서 문학수, 이중섭과 교제했다. 1943년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했다. 배동신은 1943년 제7회 일본 자유미술창작가협회 공모전에 ‘소녀’로 입상해 정회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는다. 한국 수채화단에 새바람 일으켜 배동신은 1945년 한국이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 아들 배용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했다.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했으나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들, 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1946년부터 광주서중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진도중학교, 영암중학교 등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배동신은 당시 불모에 가깝던 한국수채화단에 새로운 영역을 확대하는 역할을 했다. 1947년 광주도서관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1958년 전남여자고등학교 재직 시절 제자였던 김연규(金年圭)와 결혼했다. 그 후 20년간 그가 예술을 향한 열정에 젖어 있는 동안, 아내 김연규는 묵묵히 피아노 레슨으로 생활을 꾸려갔다. 배동신은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수채화에만 천착한 서양화가다. 그의 화면은 청결하고 단순·담백하며, 긴장된 몰입을 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1940년대의 <배>, 1950년대의<자화상> <조선장>, 1960∼1970년대의 <목포항구> <무등산> <여인-인물> 시리즈 등이 있다. 그는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 등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을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그렸다. 큰 붓을 이용해 빠른 필치를 보여주었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자유로운 선의 사용으로 운동감과 양감을 표현했다. 배동신은 유화의 밑그림 정도로 인식되던 수채화를 회화의 한 장르로 격상시키는데 기여했고, 척박한 지방 화단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했다. 일본 미술계를 사로잡다 배동신은 1968년에 박철교, 강연균, 우제길과 함께 ‘수채화 창작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수채화 창작가협회’ 창립전을 <Y싸롱>에서 열었다. 1970년 오지호, 김영태, 최용갑, 김인규, 강동문, 김수호와 ‘황토회’를 조직하고, 목포 미로화랑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했다. 1972년에는 ‘구상전’ 초대회원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한국수채화협회’ 초대회장이 되었다. 배동신은 1973년 첫 개인전을 동경과 타이페이에서 열었다.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해 성공을 거둔 이후 세 차례나 더 개인전을 열어 일본 미술계를 사로잡았다. 일본에서 그는 일곱 차례나 수상을 하면서 당당히 거장으로 부상해 갔다. 한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74년 전라남도 예술부문 문화상을 수상했다. 1976년 <희화랑>에서 초대전을 가졌고, 1977년 <예술의 전당>에서 ‘교과서미술전’에 초대된다.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 개최 배동신은 1978년 서울로 올라가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 <국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82년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25회 초대개인전을 여는 등, 1986년까지 26회의 수채화 개인전을 가졌다. 1989년 작품 소재가 풍부한 전라남도 여수에 정착해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 10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그동안의 화업을 집대성한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을 열었다. 미술평론가 ‘Perry A. Bialor’는 1990년 “배동신은 일본의 ‘후쿠사이’와 같은 그림을 향한 광적 집념의 소유자다. 유화가 육식에 비유될 수 있다면 수채화는 채식이라 할 수 있다. 유화가 동적이며 극적인 감동을 연출한다면, 수채화는 상큼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배동신의 수채화의 경도는 서양화법의 동양적 미학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배동신은 파리 화풍에서 영향을 받고 일본 화풍을 통해 조정된 특이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라고 말했다. 배동신은 오로지 수채화만을 고집했다. 그는 파리 학풍에서 영향을 받고 일본화풍을 통해 조정된 특이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 소재는 ‘목포항’ ‘접시에 담긴 사과’ ‘여성의 누드’로 이어진다. 배동신은 한 점의 수채화를 탄생시키기 위해 수백 장의 스케치와 초상을 그렸다. 그는 매일 두세 시간씩 커다란 동양화 붓을 이용해 빠르고 직접적으로 그렸다. 특히 외광에서 그려지는 풍경화는 더욱 그렇다. 배동신은 작품 속에 무한한 자유를 불어넣었다. 그 자유는 채색된 필치와 자유로운 선들이 화폭 전체에 흘러넘치면서 중복되고 겹쳐진 투명함들이 안개처럼 표현되도록 이끌어준다. 아낌없이 분출되는 단호한 선들은 배동신의 수채화 화법이 되었다. 배동신은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 등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을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제작했는데, 큰 붓을 이용해 빠른 필치를 보여주었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그의 주요 작품은 일본 동경 ‘우네노 미술관’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배동신은 1997년 제6회 오지호미술상을 수상했고, 2000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평생 동안 예술혼을 불태운 배동신은 2008년 12월 10일 전남 여수에서 향년 88세로 영면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