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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화가 황재형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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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8-12-12 11:37 조회1,6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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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화가 황재형의 작품 세계 -

    백은하 (소설가)

     

    1

    그해 겨울 사평역역사 석유 난로 앞에는 사람들이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밖에는 솜털같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온 대지가 솜털같은 함박눈의 품 속에 안겨가고 있었다. 이내 열차가 도착하고 삼십대 초반의 건장한 남자가 식솔을 이끌고 태백으로 가기위해 완행열차의 계단을 올랐다. 사평역 플랫폼에 서 있는 그의 모친의 어깨 위에 서러운 함박눈이 쌓였다. 사평역이 점점 멀어져갔다. 남자는 다시는 사평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마레샬 드 삭스사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이 문제다.”라고 말했지만 태백으로 떠나는 남자는 살기위해 태백으로 떠났다. 남자는 그의 발목을 부여잡는 많은 것들을 버렸다. 토란잎에 맺혀있는 이슬을 비추는 검푸른 새벽빛, 오전 열한시 수국꽃잎에 반사되는 빛, 높지 않은 야산의 부드러운 능선을 감싸안는 석양과 사람마다 오목가슴에 품고 있는 유장한 이야기들. 전라도에는 자식의 영정 앞에서 곡()을 하는 어미의 곡소리에도 가락이 스며들어 있다. 전라도는 자연의 빛과 부드러운 곡선, 그리고 한()이라 일컬어지는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1952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화가 황재형도 그 한()을 비켜갈 수 없었다.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이념 갈등이 심했던 보성. 황재형의 부친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남겨진 삶의 무게는 그의 모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황토색의 너른 들녘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마다 색이 달랐다. 그의 모친은 호미로 밭을 메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냈다. 노을이 밭을 메는 그의 모친의 어깨를 붉게 물들였다. 그는 가락과 한의 동네를 떠났다.

     

    황재형은 유신독재 말기에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다녔다. 그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끊임없이 질문했다. ‘나는 왜 화가가 되려고 하는가.’‘나는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그는 낡은 배낭에 스케치북을 넣고 세상의 이편과 저편을 끊임없이 걸었다. 전라남도 보성과는 또 다른 세상의 끝,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그는 어떤 장면과 조우했다.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전언 결정적 순간처럼, 어떤 결정적 순간에 맞닥뜨렸고 그 순간을 그렸다. 그렇게 태어난 <황지330>은 세상에 화가로서의 황재형의 존재를 각인시켜주었다.

     

    1980년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섰고, 황지우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발간된 해가 1983년이다. 숨도 내쉬기 힘든 정국이 계속되었다. 그가 청년기를 보낸 광주는 이중성을 지닌 도시다. 낭만성과 변혁성이 양날의 칼처럼 혼재해있다. 광주는 낭만성과 변혁성을 동시에 품고서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는 상처입은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교수와 시인과 화가들이 구금되고 감옥에 갖혔다. 펜을 꺾였고 붓을 꺾였고 가장인 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총으로 정권을 탈취한 공식적인 민주 공화국 정권의 총부리에 부모와 자식을 여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고통은 소소해 보였다. 개개인에게 다가온 고통들을 묵묵히 감수하면서 하루하루가 흘렀다. 광주는 화가 황재형에게 상처이자 그리움으로 남았다.

     

    그는 치열하게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나는 왜 화가가 되려고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예술이 공공의 선(Public goods)을 구현해 낼 수 있을 것인가.’‘지금 내가 꾸는 꿈이 과연 꿈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이 될 수 있을까.’ 그는 탄광촌 태백을 그의 인연으로 받아들었고, 1983년 태백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태백시 황지동 김흥억씨댁 전세(300만원). 태백시 화전111반 서용춘씨댁 보증금(100만원 월세 12만원). 태백시 황지동 대윤아파트 2107(전세800만원).

    황재형의 수첩에 아름다운 필체로 적혀져 있는 그가 태백에서 옮겨 다닌 그의 거처들이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그 거처들을 옮겨 다니며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작은 다락방에 작업실을 꾸몄다. 작은 작업실에서 밤을 세워 캔버스를 짠 후 까무룩 잠이 들면, 그의 아내가 소줏병에 진달래를 가득 꽂아서 손바닥 만한 작업실 창가에 놓아두었다. 보성에도 진달래가 피듯이 황지에도 진달래가 피었다.

        

    그가 탄광촌에 들어갈 때 그는 보다 바닥으로 내려가는 삶의 출발로, 소재주의적 측면에서 탄광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생의 터전으로서의 탄광촌을 화면에 담고자 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삶의 도덕성과 윤리 문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의 시적자아(Poetic ego)는 소리와 빛, 색채,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을 투명하게 응시했다.

     

    황지에 터를 잡은 후 황재형은 한국 산업사회의 동력으로 기능했던 탄광촌의 과거에서부터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고 을씨년스러운 폐광 지역에 카지노와 호텔이 들어선 현재에 이르기까지 태백 지역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했던 그는 광업소에 취직했고 광부가 되어서 갱도로 내려갔다. 갱도 안에서는 삶이 죽음이었고, 죽음이 삶이었다. 죽음이 벗처럼 가까이 있었다. 죽음과 벗이 되어야만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삶. 그는 그곳에서 <식사> <광부 초상> <탄천의 노을> 같은 작품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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