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 화가 황재형 ③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8-12-12 12:24 조회1,635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화가 황재형의 작품 세계 - ③ 백은하 (소설가) 황재형이 보여주는 화면은 재현에 충실한 사실주의에 입각해있다. 황재형이 그린 것은 사람과 자연이다. 그는 ‘거기에 그렇게 있는 삶’을 그려냄으로써 리얼리즘의 본령에 다가갔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삶의 진정성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교감, 사람과 자연 사이의 진정한 교감이다. 황재형은 있는 그대로의, 그 시간대 그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과 자연을 그렸다. 그는 풍경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면서 관람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나 ‘감동’ 센티멘탈한 ‘노스틸지아’를 주는 작품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적이기만 한 것’을 그리고자 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2010년 그의 그림을 보는 관람자들은 감정이입이 된다. 급격한 산업화를 겪고 난 사람들에게 그의 작품을 ‘추억’을 선물한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알리아> <세발 자전거> <얼은 빨래> <앰블런스> <슬레이트와 화분> <접시꽃> <월급날> <볕이 드는 두문동> 등의 작품은 담담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스케치다. 젊은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탄을 캐서 번 돈으로 아들의 <세발 자전거>를 사들고 집으로 가고, 봄이면 그의 젊은 아내는 파란 슬레이트집 앞에 <접시꽃>씨앗을 뿌린다. 탄광촌에도 봄은 오는 것이다. <세발 자전거>의 풍경은 담담해 보인다. 봄볕일수도 있고, 가을볕일수도 있다. 사각의 프레임에 청색톤의 집 한 채가 있다. 그리고 그 집 앞에 세발자전거 하나가 놓여 있다. 그 것뿐이다. 등장인물도 없고 나무 한그루, 하물며 들꽃 한 송이 없다. 그러나 그 집 앞에 대문을 향해 놓여져 있는 세발자전거는 숱한 것들을 은유한다. 서너살박이 살구 냄새나는 사내아이와 젊은 아버지와 젊은 엄마. 이제 막 세발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질주하는 사내아이의 발그레한 뺨. 그 사내아이를 스쳐가는 차가운 봄바람. 차가와진 아이의 양 손을 감싸안고 아이의 뺨에 입맞춤하는 엄마의 입술. <세발 자전거>와 <슬레이트와 화분>은 다른 작품이지만 구도도 정조도 닮아있다. 작은 창문이 있고 무너져갈듯한 슬레이트집 앞에 그저 화분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다. 나비도 없고 개도 없다. 볕을 쬐고 있는 화분은 안온한 기분을 갖게 한다. 저 집안에서 살림을 하는 안주인은 강파르지 않고 된장국과 버섯전골을 잘 끓일 것만 같다. 보다 더 극적인 상황이 느껴지는 작품은 <앰블런스>다. 죽음과 벗이 되어서 살아가는 탄광촌 사람들에게 앰블런스에서 울려 퍼지는 사이렌소리는 두려움을 주는 소리인 것이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들은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집 밖으로 나와 본다. 밀레의 <첫걸음>처럼, 황재형의 작품들은 그가 보고 들은 것을 포착해서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그 보여줌에 인정이 담겨있다. 그가 잡아낸 <다알리아>는 코발트색과 어우러져서 낭만성이 느껴진다. 그가 치열하게 사유하고 원했던, ‘예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닌, 우리가 처해있는 아픈 현실, 온갖 모순과 갈등의 요소를 일깨워주며 고통스럽지만 이를 인식하고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성적인 미학’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준다. ‘예술의 심미적(審美的) 기능’과 ‘무엇을 말할 것인가.’ 사이의 탁월한 접점이 보인다. 리얼리즘 미술이 잃어버리기 쉬운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도달했다. 화면을 가득 메운 달콤한 청색톤과 독(毒)을 품지 않은 태백의 사계(四季)는 그가 세상과 화해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