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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비가 내리는 강변 / 화가 한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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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백은하 작성일06-09-13 09:05 조회5,6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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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비가 내리는 강변

                                                       화가 한희원의 작품세계


    백은하(소설가)




    푸른 비가 내린다. 푸른 비가 내리는 새벽, 한 사내가 안개 낀 강변을 걷고 있다. 사내의 모습은 아스라히 사라지고 안개만 남는다. 화가 한희원의 화면에는 안개와 사내의 발자국만 남는다. 한희원은 ‘바람의 끝에 서서’라는 창작일기에서 안개 속을 걷고 있는 사내의 마음을 이렇게 말한다.


    “몇해전 본촌부락에 화실에 있을 때/화실로 가는 길목에 은사시나무 숲길이 있었다/낡을대로 낡은 거리였지만 작은 바람에도 은사시나무잎이 /온통 은빛으로 떨릴 때면/세상의 모든 그리움이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나는 그 중 가장 작은 잎 하나를 가슴에 안고 산다.”

    흔들리는 은사시나무의 숨결이 화가의 가슴을 지나, 화폭에 내려앉았다. 아찔할 정도의 미(美)에 도달한 한희원의 화폭에 흐르는 정조는 ‘그리움’이다.


    한희원의 작업실에서 작품들과 오래 된 팔레트, 액자가 되어 있는 원고지 위의 시(詩)들, 피아노 선율을 뒤로 하고 나서면서 필자는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안개가 떠올랐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사내는 결국 ‘무진’을 떠나 근대적인 공간, 개화한 자본주의적인 공간으로 떠나간다.


    그러나 한희원의 화면 속에는 아직 ‘무진’에 머물러 있는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봄에는 찔레꽃향을 맡고, 가을이면 떨어지는 샛노란 은행나무잎을 쓸고, 가을이면 ‘사평역’의 다사로운 불빛 앞에서 막차를 기다린다. 혹은 산문에 기대어 도시로 유학을 가는 동생을 떠나보내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누이들은 산문에 기대어 서 있기도 하고,

    흰 눈 내리는 밤, 정미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바라보고 서 있기도 한다.


    ‘떠나는 사람들의 마을-첫사랑’(1998)에는 보라빛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나무에 기대서서

    정미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 불빛 안에 그녀가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도시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을 수도 있다. 그날 밤 쌀쌀한 바람이 그녀를 할퀴고 지나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날밤을 영원히 추억하며 살 것이다.


    그의 작품 ‘그해 겨울’(2003)에는 눈발이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등장한다. 그들의 뒷모습 또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한희원의 ‘그해 겨울’과 이청준의 소설 ‘눈길’이 교차한다. 이청준의 소설 ‘눈길’에는 새벽에 눈길을 걷는 모자가 등장한다. 아들은 어머니를 뒤로 하고 도시로 떠나간다. 어머니는 그 새벽에 혼자서 눈길 속을 걸어서 되돌아온다. 아들은 그 날의 새벽을 잊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눈길은 그의 가슴에 상처로 남는다.

    한희원의 작품에는 나무가 자주 등장하는데, ‘깊은 상처와 나무’라는 작품은 상처로 가득찬 심연의 풍경이다. 나무는 검게 상처입었다. 또 다른 나무인 ‘푸른비와 나무’는 상처입기 전, 순수의 시간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 제목은 ‘순수의 노래’(Song of innocence) 와 ‘경험의 노래’(Song of experience)이다. 인생은 ‘순수’의 시간들이 지나가고 나면 ‘경험의 시간’이 남는걸까? 블레이크는 ‘순수’의 다음 시간을 ‘경험’이라고 했다. 그 경험안에는‘상처’가 녹아있다. 상처입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다. 나이든다는 것은 경험이 쌓이는 것이다.

    한희원의 작품들은 ‘경험’ 즉 ‘상처입은 영혼’보다는 아직 ‘그리움을 안고 있는 영혼’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관람객과 진정으로 소통하는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찔레꽃 피는 섬진강변’에는 완전한 ‘순수’의 시간이 펼쳐진다. 찔레꽃과 새벽달, 그리고 잔잔한 강물. 가을의 어느 날 하루인 ‘강과 만추’에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숨어 있다. 노란 은행나무잎이 가을 바람에 흩날린다. 그 사이로 검은 선 하나,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그 기차는 여수로 가고 있다.


    한희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년 동안 혼자서 시를 습작했다고 한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막막하게 시를 쓰고 있던 중, 우연하게 누나로부터 그림을 소개받고 조선대 미술교육학과에 진학한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는 유신말기였다. 그는 ‘임술년’ 그룹 회원과 광주 ‘양림교회’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민중의 일상의 삶에서 역사성을 찾는 작업들을 한다. 최초의 민중미술이라고 평가받는 5m 대작인 ‘가난한 사람들’이 1978년에 발표된다. 그 때는 주로 수채와 과슈화로 작업을 했는데 ‘소쩍새 울던 날’ ‘섬진강’ 등의 작품이 있다.


    삶의 거처가 순천에서 광주로 옮겨가면서 그의 신창동 작업실 시기가 시작된다. 그는 그곳에서 전형적인 삶의 원형을 품고 있는 공간을 만났다고 한다. 신작로와 작은 교회, 정미소 등이 정밀하게 배치된 전형적인 전라도의 시골 풍경이었다. 이 곳에서 그는 ‘신창동 밤풍경’ ‘여수로 가는 막차’ ‘겨울 정미소’ ‘귀로’ 등 문학적 서정성이 짙은 풍경화들을 그린다. 그리고 1993년 경인미술관의 3개관에서 무려 150점의 유화 작품들로 첫 개인전을 열어서 호평을 받는다. 시인 곽재구는 당시의 작품들을 ‘별이 있는 따뜻한 심연’으로 표현했다.


    ‘여수로 가는 막차’는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화가의 어린 시절 쓸쓸한 추억이 녹아있는 그 작품은 훗날 한희원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문학적 서정의 절정을 보여준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별 내리는 신창동’이라는 작품이다. 푸른 하늘에 별들이 빛나고 있고, 두 갈래로 나뉘는 신작로에는 가로등 불빛이 빛난다. 마을은 고즈넉히 잠들어 있다. 가장 최근작은 수묵화의 필법이 드러나는 ‘추강월색’, ‘백련암 가는길’ ‘겨울귀로’에까지 이르렀다.


    한희원의 작업실 안에는 시가 있고, 시간이 내려앉은 팔레트가 있었다. 필자는 한희원이 보여줄 ‘여수로 가는 막차’가 도착한 미지의 공간을 연상하면서 그의 작업실을 나섰다. 그 공간이 부디 훼손되지 않은 ‘순수의 공간’이어서 또 다시 오랜 시간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잡았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소망을 품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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