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비친 빛과 생의 화음; 한희원 근작 회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인호 작성일26-02-04 13:33 조회331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한희원 <상처난 별들의 춤>, 2025, 캔버스에 유채, 150.5x270cm 영성에 비친 빛과 생의 화음; 한희원 근작 회화 오지호미술상 수상작가 초대전, 2026.01.30-04.12, 광주시립미술관 생의 연민에서 빛과 안식의 세계로 한희원의 회화는 색으로 녹여낸 영혼과 생의 화음이다. 그의 화폭에는 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한 고독과 우수와 생에 대한 연민과 사유가 켜켜이 쌓여있다. 그림과 시로는 다 풀어낼 수 없을 듯한 사무치는 정한(情恨)의 울림이 있다. 그 정한의 바탕에는 생에 대한 연민과 성찰, 근원적 고독이 깔려 있어 보인다. 시절 따라 그림의 소재나 형상은 약간씩 변해 왔지만 어쩌면 한희원 회화의 원류를 이루고 있는 마음자리가 늘 그러지 않았나 싶다. (중략) 이번 오지호미술상 수상작가 초대전에서는 이전의 거칠고 투박하게 드러내는 표현 형상보다는 내면의 깊은 성찰로 침잠해 들어가는 사유의 통로로서 무언의 화폭들이 대부분이다. 평소 반복되는 작업은 쉽게 질려 늘 또 다른 작업을 시도하곤 한다는데, 꽤 긴 시간 보여주던 작가 특유의 서정적 풍경과 인물, 꽃그림 등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즉, 그의 그림을 읽어내는 문학적 서사의 단초이던 형상들이 증발해버린, 아득히 몽롱하거나 질료의 물질감이 전면을 가득 채운 추상적 화폭들이 대조를 이룬다. 대부분 2025년에 제작된 최근 연작들인 이번 전시작품의 주제는 ‘빛’과 ‘생명’, ‘안식’, ‘생’ 등등이다. 얼핏 종교적 간구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한때 심취했던 신심(信心)의 회화적 표현이기보다는 그의 본래 성정에 자리한 ‘가난한 영혼의 기도’로서 근원적 화두들이다. (중략) 생의 단상들로 일렁이는 내면의 파문 이번 전시작품에서 ‘빛’과 ‘생’을 다루는 작품들이 서로 의미하는 바에서는 같은 맥락을 가지면서도 화면 형식에서는 대조되는 차이를 보인다. <생으로서>와 <생의 파편>의 경우는 평소 즐겨 쓰는 울트라마린(군청)을 기조로 여러 색을 두텁고 거칠게 흩뿌리고 비비고 긁은 흔적에서 예전 작업의 부분인 것처럼 유사성을 띠기도 한다. 그러나 생의 상처와 고뇌와 열락(悅樂)을 오로지 촉각적 마티에르만으로 채워내어 읽을거리인 회화적 형상을 완전하게 털어버렸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과감한 변화를 보인다. 희노애락을 넘나드는 인생사에서 ‘생’의 한 소용돌이를 함축해서 비춰내면서도 문학적 서사와 회화적 형상과 개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일탈의 흔적들이다. 같은 ‘생’을 주제로 하면서도 <생의 파문>은 또 전혀 다른 표현이다. 짧게 짧게 분절시킨 두터운 물감의 파편들이 3m가 넘는 대형 화폭 전면 가득 겹치며 일렁이고 있다. 시시각각 각기 다른 표정들을 지어내는 일상의 잔편들일 수도 있고, 개인의 삶에서나 인생이라는 큰 풍경으로나 한순간 한 개인들의 집합이 파노라마처럼 ‘생’의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수많은 시간의 무리 속에 섞여 나의 시간과 길을 걷는다”는 작가의 자작시 한 구절처럼 끊임없이 겹쳐지고, 덧입혀지고, 스러지고, 새로 쓰여지는 생의 단상들이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생의 일기>는 황혼기 인생을 암시하는 듯한 붉은색을 옆으로 길게 문질러 전혀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넓게 발라진 띠들처럼 덮여 채워진 화면은 간구하고 동경하는 피안의 세계 앞에 놓인 거대한 벽으로 다가오기도 하면서, 애잔한 삶의 퇴적이거나 일상의 주름일 수도 있고, 안으로부터 그득히 차오르는 환희심일 수도 있다. 작가가 시로서 읊조린 “허무와 환희가 안고 춤을 춘다. 조용히 격렬하게...”의 회화적 분출로 보여지기도 한다. 화면 분위기를 우선하면서 문학적 서사의 서정적 형상으로 깊은 감성을 우려내던 이전 화폭들과는 전혀 다른 시도다. 마음자리을 쓸어 찾는 내 안의 빛과 안식 ‘생’을 주제로 한 작품들과 같은 시기에 제작되면서도 회화적 뉘앙스나 화면 형식에서는 전혀 다른 것이 ‘빛과 생명, 안식’ 연작이다. (중략) 오직 어슴푸레 번지는 빛의 어른거림만이 상념을 털고 사유로 침잠하도록 이끄는 안식처로 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 안식처는 생의 굴레와 잔편들이 녹아 사라진 궁극의 고요한 평안이면서, 그러나 아직 또렷이 잡히지 않는 본질적인 세계, 피안의 이상향으로서 그림과 시와 음악으로 간절히 동경하는 간구(懇求)의 심상세계이다. 대지와 허공의 구분, 영과 육의 분별, 이승과 저승의 경계도 털어버린 육탈된 정신의 세계이기도 하다. (중략) 근작 중심의 이번 전시에서 ‘빛과 생명’, ‘빛과 안식’, ‘빛의 풍경’ 연작들은 그렇게 안개 자욱한 새벽녘처럼 어떤 형상이나 형체의 그림자도 어른거리지 않는다. 오히려 인위적 행위의 흔적이나 안료의 물성이 정신적 사유의 침잠을 방해할까 싶어 붓 터치나 나이프질 같은 어떤 화구의 흔적도 생략했다. 다만 손과 휴지로 드러나는 요소들을 문질러 지우거나 그 위를 빗자루로 넓게 쓸어 깊은 침묵을 더 올리는 암중모색을 반복함으로써 혼탁한 상념의 안개 속에서 마음자리의 빛을 찾아가는 흔적들만 아스라이 남겨놓을 뿐이다. 설령 그 침묵의 공간에서 쏟아지는 빛줄기나 연푸른 오아시스의 번짐이 우러난다 해도 그것은 작가가 특정하지 않은 심상의 연상일 따름이다. ‘생’과 ‘빛’의 중간지점에서 균형 다른 한편, 한희원은 ‘생’과 ‘빛’을 탐닉하는 중에도 온전히 그 세계로만 빠져들기보다 늘 나라는 존재를 되비춰보는 작업도 병행한다. 이 생 밖의 다른 세상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해탈의 수도자도 아닌, 그렇다고 닥치듯 생에 맞서는 전투적 인생살이도 아닌 그로서는 지금의 생으로부터 완전한 증발도 원치 않고, 무엇을 그린다는 행위와 질료에 뒤범벅되어 생에 매몰되고 싶지도 않은 예술 유랑인(Bohemian)으로서 그 중간지점의 균형잡기에도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다. <미루나무>나 <새>는 문득 동질감을 느낀 고독한 존재에 자신을 빗대어 생 가운데 현존을 함축하고 있는 예이다. 예전부터 그가 가끔 화경(畵景)에 끌어들이는 의인화한 상징적 소재다. 거친 세파 속에 꿋꿋이 버티어 선, 생의 번민과 영혼의 갈증 속에서도 꿈을 소망하는 흑암 중의 한 그루 키 큰 나무와, 푸른 새벽빛 속 고독한 새는 미망(迷妄)의 세상 한 가운데 홀로 깨어 있는 그 자신의 내면 초상에 다름 아니다. <기도가 그린 풍경>은 어렴풋하지만 훨씬 더 짙게 존재의 성찰을 담아낸 상징적 초상이다. ‘빛’ 연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형상도 드러나지 않은 온통 희뿌연 안개 속 무한공간에 여명 같은 빛의 어른거림으로 어슴푸레 홀로 선 인물 형상을 짐작할 뿐이다. 뚜렷한 서사의 언술보다는 의도적 생략과 은근한 가리기로 형상 너머의 성찰로 이끌기 위함일 것이다. 모든 게 미지에 휩싸인 모호하고 불분명한 세상에서 오직 나라는 깨어 있는 자존으로 신새벽을 기다리는 잠들지 못하는 영혼의 초상이다. (이하 생략) - 조인호(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한희원의 오지호미술상 수상작가초대전 평문 중 발췌 한희원 <생명의 노래>, 2025, 캔버스에 유채, 193.9x259cm 한희원 <생의 일기>, 2025,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 한희원 <생의 파문>, 2025, 캔버스에 유채, 150x330.3cm 한희원 <빛과 안식>, 2024, 캔버스에 유채, 162.2x130.3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