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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소나로 상징된 박양선의 조각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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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조인호 작성일18-01-20 17:19 조회3,8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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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양선 <가면의 여인>, 2000, 브론즈, 80x70x90cm


    페르소나로 상징된 박양선의 조각세계

     

    광주시립미술관 원로작가 아카이브전 3

    2017.12.09.-2018.02.10

     

    광주미술계에서 조각가 박양선(1937~ )의 작품세계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태생과 학업의 바탕이 달라서인지, 내적 감성이나 추구하는 예술세계에서 나타나는 개성 때문인지 일반적인 남도조각과는 성향을 달리한다. 타향인 광주에 내려와 수십년 동안 대학 강단과 작품활동으로 지역에 몸담아 왔지만 내적 외적 요인들 때문에 자의와 타의로 지역 조각계에서 평생 아웃사이더처럼 지내왔다. 그런 박양선의 조각세계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광주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아카이브 프로젝트세 번째 전시로 지난 129일부터 210일까지 미술관 3·4전시실에서 마련되어 있다. 공식적인 전시회 명칭은 [광주시립미술관 아카이브 프로젝트3: 삶과 예술 그리고 여성]이고, 여기에는 박양선 외에도 서양화가 강숙자(1941~ ), 서예가 소현 류봉자(1946~ ) 등 원로 미술인 3인의 작품과 자료들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여성미술인들이 드물던 1960년대 초부터 이제 성장하기 시작하는 지역미술계에서 자기 터를 다지고 작품세계를 펼쳐내어 온 지역미술계의 원로들이다.

    이 가운데 박양선의 경우는 특히 여성작가들의 진출이 흔치 않았던 지역 조각계의 초기작가라는 점에서 더 주목된다. 전통 화맥이 뚜렷한 서화계와 신문화로 여겨지던 서양화의 예술적인 멋과는 달리 거친 물리적 재료들을 다루는 노동 같은 작업이라는 점에서 전공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박양선 조각가가 광주에 연고를 두게 된 것은 1962년 결혼 이후이다. 원래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중국 상해에서 보내고 해방 이후인 1948년 서울로 돌아와 숙명여고와 홍익대학교 조각과에서 공부하였다. 시인이었던 부친 박거영(1916~1995)의 든든한 뒷받침 속에서 숙명여고 시절에 한국 현대조각계의 초기 작가인 김정숙(1917~1991)과 윤영자(1924~2016)를 만나고, 홍익대학교에서는 역시 초기 조각가인 윤효중(1917~1967)으로부터 조각 수업을 받으면서 화가의 꿈을 조각가로 바꾸게 되었다. ‘영혼의 고향 같은 흙의 향기와 감촉을 주무르면서 위안을 얻고 이를 평생으로 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1962년부터 결혼생활을 시작한 낯선 땅 광주에서, 지연·학연이라는 연고의식이 직간접적으로 작용하던 시기에 개인의 정서나 생활에서도 생면부지인 타향에서, 가정이나 작품활동에서 새둥지를 틀어야 했던 이방인이었던 셈이다. 60년대는 1963년부터 조선대학교 여자초급대학 공예과 교수와 미술학과 강의 등으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할 때지만 초기작품 자료들은 희박하다. 결혼 초기인데다, 그렇잖아도 조심스러운 낯선 문화 속에서 이질적인 미술장르인 조각으로 적극적인 작품활동을 하기에는 여건이 편치는 않았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 아카이브 전에서도 이 초기작들은 소개되지 않고 몇몇의 사진자료들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전시를 기획한 홍윤리 학예사가 “1970년대에 추상성을 강조한 조형작품을 제작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작품이 모더니즘적 실험과 구상이 공존하는 양식으로 변화했고, 1990년대 이후 구상형상의 조형세계를 추구했다.”고 전시도록에 큰 흐름을 언급해 줄 뿐이다.

    자료사진으로 본 1969년의 <후념>은 고개를 떨군 채 비탄에 젖어있는 듯한 여인좌상이다. 비교적 사실적인 묘사의 구상조각이지만 외형적 여체미보다는 내면 심리묘사에 중점을 두는 작업성향이 이 시기부터도 잘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같은 시기의 <>(1969)이나 <연륜>(1970)은 유선형의 입방체로 조형미를 탐구한 예인데, 이후로도 더불어 계속되는 구상과 반추상 두 흐름의 탐구를 보여주는 이른 예이다.

    이번 전시작품 중 가장 이른 예인 <목울음>(1970)은 브론즈로 제작한 두상이다. 이목구비를 굵직굵직 표현하는 그의 양식대로 비교적 단순 묘사된 얼굴이지만 그러나 고개를 뒤로 젖힌 여인의 표정은 애써 삭히고 있는 깊은 슬픔이 소리 없는 눈물로 감은 눈에 흥건함을 느낄 만큼 감정표현은 생생하다. 초기부터 주로 반추상 또는 추상작품 작품들을 위주로 조형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내적 감정을 담아내는 인체구상도 그에 못지않게 심혈을 기울여 왔음을 알 수 있는데, 1970인체를 단순 변형시킨 석고시멘트 조각상으로 그의 첫 개인전이자 광주미술계에서 여성 조각가 가운데 첫 조각전시회를 광주 Y다실에서 가졌다.

    1980년 작인 <절규>는 반나의 여인들이 허리를 숙인 채 반원형으로 둘러서서 우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구성이다. 우물도 상징적으로 절반만 표현한데다 여인들의 머리칼과 이목구비나 설명적인 요소를 생략한 유려한 흐름의 인체묘사가 드라마틱한 상황설정으로 읽혀진다. 이후 작품들에서도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내면 감정과 묵언의 얘기들을 조형적으로 함축시켜내는 방식의 두드러진 예다. 같은 1980년 작인 <기다림>은 인체의 굴곡이나 볼륨을 절제시킨 단순 유선형의 여인입상이다. 고개를 떨군 채 볼록한 복부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있는 여인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고대하며 기도하는 듯한 모습이다.


    박양선 <절규 II>, 1980, 50x30x30cm

    그의 조각 생애 중 가장 왕성했던 활동시기였던 듯 1990년대에는 1970년 첫 개인전 이후 오랜 공백기를 깨고 다섯 차례(1990 광주 남봉갤러리, 1991 부산갤러리, 1997 서울 롯데화랑·광주 캠브리지갤러리, 1999 광주 신세계갤러리)의 개인전을 연달아 열고, 중진 서양화가인 김영태 화백과 2인전을 갖기도 했다. 물론 70년대에는 한국여류조각가회전과 함께 주로 광주·부산·서울 등지에서 열린 현대미술제와 앙데팡당전, 현대작가 에포끄회전 등 진취적 현대미술 전시들에 참여하고, 80년대는 여러 성격의 기획초대전들에 출품하며 작품활동은 계속 이어왔다. 특이한 점은 이 90년대 들어 그런 공적인 단체전이나 기획초대전들이 줄고 개인전에 집중하다가 다시 2000년대 들어 개인전 없이 간간이 외부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토르소>(1991)는 극도로 단순화된 형상으로 인체를 함축시켰고, 1997년의 <누워있는 토르소>91년 작보다는 여체의 특징적인 볼륨들이 강조되긴 했지만 상체를 일으킨 여체의 이목구비와 세부묘사를 생략되어 있다. 1995<연인>도 나란히 걸터앉은 남녀를 큰 곡면으로 단순화시켜낸 작품이다. 이 같은 조형적 단순미와 곡선형의 인체구성은 그의 작품에서 구상적인 인체묘사 작품들과 더불어 크게 두 축을 이룬다.

    이전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이 같은 조형미와 탐구와 더불어 내적 심리상태와 감정, 내면에 깔린 상황을 드러내는 대표적 작품으로 <D의 여인들>(1995)을 들 수 있다. 슬픔이 짙게 드리워진 표정의 여린 여인을 네 여인이 어디론가 인도하며 함께 걷고 있는 상황연출 구성이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연상케 하는 군상이면서 세세한 묘사를 생략했음에도 작품 전체에 흐르는 비감한 분위기가 문학적 서술성과 애상의 정서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박양선 <D의 연인들III>, 1995, 브론즈, 50x30x40cm

    한편으로 박양선 조각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페르소나이다. 초기부터 전체 작업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이고, 특히 2000년대 들어 가장 집중되는 연작이기도 하다.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나타나지만 <여인좌상>(1968)도 사실적인 여체묘사지만 얼굴은 가면을 쓴 상이고, 70년대 작이라는 <페르소나>는 고뇌에 찬 얼굴을 가린 웃는 표정의 가면을 들고 있기도 하다. 1991년 작 <페르소나>는 낮게 깎아낸 코 외에는 이목구비를 완전 생략시켜 무표정한 가면을 기하학적 단순두상에 씌워 놓은 모습인데, 내면을 들키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인간 삶의 이중성, 삶 가운데 마주치는 진실과 허상 등을 도식화시켜 놓기도 했다. 두툼한 몸집과 거친 질감의 의상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구상좌상인 <가면의 여인>(2000), 아예 마주보는 두 개의 가면만 단순 조형화시킨 <페르소나 키스 >(2010)는 같은 주제지만 서로 대극점을 이루는 표현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언젠가 가면무도회에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다 보니, 사람들이 가면을 쓰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더군요. 가면이 또 다른 얼굴인 셈이죠. 페르소나 시리즈는 인간의 양면성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제작하게 된 작품입니다.”(광주일보 2018.1.10.)

    그 당시는 구상을 하면 바로 페르소나가 되어 버리더라고... 밖으로 표현하기보다 내면의 정서 속에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60년대 후반에 오면서 본격적인 페르소나 이야기가 많아졌죠. 내가 만난 사람들의 외면의 얼굴과 내면을 보면서 전혀 다른 한 사람이 그의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지. 마치 내가 인체와 얼굴을 제작하는 작업을 할 때 나의 내면에 깃든 생각과 마음이 작품의 외면에 표현되면서 느낌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야”(광주시립미술관 아카이브전 도록 회고 중)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얘기지만, 태생지가 달랐을지라도 또는 사승관계에 따른 조각의 계보가 다를지라도 광주를 기반으로 활동한지 이미 60년 가까이 돼가는 박양선의 조각세계는 남도조각의 중요한 자산임은 부인할 수 없다. 어려서부터 타국과 타지로 옮겨 다니면서 스스로 이방인이라 여겼던 소외감과 마음 편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낯선 환경들, 그 가운데 상처와 격려, 삶 속에 부딪혀 온 많은 굴곡들.. 그러저런 자신의 내면 심리와 감정들이 이번 전시에서 읽혀지는 작품의 주요 정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 조인호 (광주비엔날레 정책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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