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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미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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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유상생의 자연주의 미학


    무등산자락 원림과 누정

    남도 정신문화의 모태로 무등산 자락의 가사문화권 또는 시가문화권을 든다. 단지 지역문학 차원이 아닌 한국인의 삶의 철학과 정신사적 맥락, 건축ㆍ조경ㆍ시대사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성산시단의 무대 식영정과 면앙정시단의 산실 면앙정 등 시가문학, 죽림정사ㆍ수남학구당ㆍ창평향교ㆍ몽한각 같은 조선중기의 선비문화 또는 유림문화, 원효사ㆍ개선사터 등 탈속의 무유등등 불교적 세계, 정자와 원림 조영의 도가적 자연주의, 충효동 분청사기의 천진무구한 파격미 등 호남문화를 거의 아우르고 있는 셈이다.

    이 가운데 무등산 일대의 원림과 누정들은 대부분 조선 성리학과 사림문화의 정착기인 16세기를 중심으로 조성된 것들이다. 독수정(14세기말)ㆍ소쇄원(1520년대)ㆍ면앙정(1533)ㆍ식영정(1560)ㆍ환벽당(16세기중반)ㆍ송강정(1584)ㆍ풍암정(16세기말)ㆍ죽림정사(16세기) 등이 그렇다. 가사문학의 대가라 하는 송강 정철이 주기파의 중심에 있던 율곡 이이와 같은 호당에서 활동하면서 현실과 현장감흥을 중시하는 문학세계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세계관을 탐구하는 학파의 형성으로부터 비롯된 당쟁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기득권확보로 치열해지면서 신구세력 또는 외척간의 권력분쟁과 문벌정치로 비화되고 있었다. 특히 1519년 기묘사화 무렵에는 동인 서인으로, 다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고, 이후 북인은 광해군을 세웠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는 등 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데 무등산 자락 원림 누정도 이러한 어지러운 세태와 연관되고 있다.

    조성시기가 가장 오래된 독수정(獨守亭)은 고려말 공민왕 때 무신 전신민이 조선왕조로 세상이 뒤바뀌자 낙향 은거하면서 매일 아침 조복 차림으로 송도를 향해 곡배(哭拜)하며 망국의 한과 충정을 토해내던 곳이다. 또 자연계류를 따라 넓지 않은 산자락에 절묘한 공간배치와 건축구조로 조영된 지실마을 소쇄원(瀟灑園)은 소쇄옹 양산보가 세상에 뜻을 막 세우려던 17세 어린 나이에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1519)로 화를 입자 세상을 등진 채 세간의 티끌을 멀리하며 문인 지인과 더불어 학문 시정을 나누던 곳이다. 소쇄원 대숲을 벗어나 자미탄 건너편 언덕의 환벽당(環碧堂)은 나주목사 사촌 김윤제가 을사사화(1545년) 후 낙향한 뒤 학문을 닦으며 정철과 고경명 김덕령 등 후학을 길러내던 곳이며, 건너편 별뫼의 식영정(息影亭)은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 석천 임억령에게 지어 드린 것으로(1560) 뒤에 성산별곡을 비롯한 송강 정철의 주요 가사문학 작품의 무대가 되었다.

    또 무등산쪽으로 훨씬 깊이 묻혀 있는 풍암정(楓岩亭)은 김덕령이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사(1596년)하자 형 김덕보가 홀로 은거하던 곳이다. 그리고 고서 후산마을의 명옥헌(鳴玉軒)은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한림학사로 불러 올린 오희도가 1년도 못되어 천연두로 세상을 뜨자 아들 오명중(1619~55)이 낙향하여 부친의 서재(忘齋)자리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던 곳이다.

    무등산 자락에서는 거리가 떨어져 봉산의 너른 들과 오례천을 앞에 두르고 낮으막한 산언덕에 올라앉은 면앙정(勉仰亭, 1533년)은 노년의 송순이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와 호연지기를 즐기던 곳이다. 특히 면앙정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한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길러내던 곳이며 또한 면앙정 장가, 잡가, 담가, 오륜가 등 18편이 지어진 것으로 이 호남 첫 시단은 뒤에 송순의 문하생이었던 정철을 중심으로 성산시단이 싹트는 밑거름이 되어 조선 중기 문학을 꽃피우게 하였다. 또 이곳 가까이의 송강정(松江亭)은 1584년 대사헌 정철이 당쟁으로 물러난 뒤 1589년에 우의정으로 다시 올라갈 때까지 죽녹정(竹綠亭)을 고쳐 짓고 머물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가사문학의 걸작들을 남긴 곳이다.



    호남정신의 모태로서 토착 유가문화

    한편으로 이 시가문화권 일대에서 조선 선비문화의 전형을 볼 수도 있다. 자연본성과의 내적 교감, 부단한 자기수양을 통한 인격도야, 그리고 정신적 사의성(似意性)과 풍부한 시정(詩情) 또는 예술적 흥취는 여러 시문 속에 담겨지면서 결국 후대 정신문화의 토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남도문화의 맥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향(文鄕)의 전통으로서 지(知)와 예(藝)의 조화가 품격 있는 시ㆍ서ㆍ화로 농축되면서 지역문화의 큰 줄기를 이루게 해 준 셈이다.

    아울러 자연만물과 한 데 어우러진 만유공생의 세계관 또한 남도인의 심성과 후대문화와 연관성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초려삼칸 지어 나 한 칸, 청풍 한 칸 나누어 쓰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놓고 보리라’는 송순의 호연지기나, 면앙정30영ㆍ식영정20영ㆍ소쇄원48영 같은 여러 시문 속에서 구름과 여울과 바위ㆍ계류ㆍ솔ㆍ대숲을 비롯, 달빛이나 바람결 같은 무형의 것들이 모두 주인공이 되고 있다.
    또 맑고 고고하되 군림하는 형세를 피하면서 건축구조도 열고 닫힘이 자유롭고 자연과 더불어 호흡을 나눌 수 있도록 트여 있는 점에서 모든 생명존재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상생의 미학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초탈을 꿈꾸며 지적 유희에만 젖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송순에게서 학문을 닦았던 고경명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정언 교리 동래부사 등을 지냈고 한 때 식영정을 드나들며 김성원 정철 백광훈 송익필 등과 사귀었는데 임진란이 일어나자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다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또 김윤제에게서 학문을 익힌 조카손자 김덕령은 임진란 때 의병을 모아 권율을 도와 전라 경상일대 각처에서 익호장군 이름을 드날리며 왜군을 물리쳤으나 누명을 쓰고 고문 끝에 옥사하고 말았다. 의로움과 실천적 충의정신으로 의향 호남의 맥을 이루고 있는 실 예들인 것이다.

    따라서 무등산자락 원림 누정문화는 선비사회의 학문도야와 풍류의 멋을 바탕으로 자연주의적 감흥이 물씬 우러나는 지역문화의 원류이자 현상과 이성 감각중심의 현대문화 속에서 자연본성과 예술적 흥취를 되살려 줄 정신문화의 샘이라 하겠다. 피안의 이상향과 현세 사이에서 때로는 초탈한 선비로, 때로는 시대의 선도자로서 당대 실천적 지식인의 소임을 다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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