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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서양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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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유학파와 전후 화단활동


    해방 후 유학파들의 활동과 화단형성

    남도 서양화단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는 해방 이후 그 주도적인 역할은 대부분 태평양전쟁 혼돈
    기의 이른바 유학 2세대 작가들에 의해서다. 1세대 선배들이 대개 외지에 머물거나 개별적인 활
    동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이들 2세대 청년작가들은 화단이라는 활동무대를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국내 대학에 미술과가 개설되기 이전에 일본 유학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서구미술을 익히고 돌
    아온 이들에 의해 초창기 화단이 싹을 틔울 수 있었다.
    1939년 강용운·배동신·양수아 등 6명을 비롯, `40년의 고화흠·양인옥·윤재우 등 7명, `42년의 김
    인규 등 2명, `43년 김영자 2명, `44년 손동 등인데 전체적으로는 태평양미술학교와 천단화학교
    쪽이 많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39년과 40년에 대부분 집중되고 있다.

    이들은 해방을 전후하여 귀국한 뒤 광주와 목포를 중심으로 불모지에 서양화를 이식하기 시작
    하였다. 실제로 해방 후 새로운 기대와 의지들로 미술단체 결성이 잇따르던 중앙 미술계와 마찬
    가지로 1945년 12월 광주에서도 첫 대규모 미술전람회로 [전남 동서양화 합동전시회]가 중앙국
    민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이미 유명작가가 되어 있던 의재 허백련과 연진회원들의 한국화 작품들을 비롯, 아직 일반인들
    에게는 낯설기만 한 서양화까지 배동신·손동 등의 작품을 통해 함께 소개된 종합전이었다.

    한편 `45년에서 `47년까지 해방공간은 사회·문화계가 가장 어수선했던 시기다. 그 동안 식민지
    시기 억눌려 있던 욕구와 기대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데다 좌·우익 이념적 분파대립으로
    혼전이 거듭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계도 `45년 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9.16)와 이를
    모태로 한 [조선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9.20), [조선미술협회](11월)에 이어 수많은 단체들의
    창립과 해체·소멸·재결성이 계속되었다.

    물론 뚜렷한 조형논리나 예술이념의 차이보다는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린 세력판도 형성의
    성격이 강했지만 외형상으로는 ‘일제잔재 척결’과 ‘민족미술건설’ 등 주체문화 수립의지들을 주
    된 활동목표 구호로 내걸고 있었다.

    개항이래 축적시켜온 문화적 여건이 상대적으로 앞서 있던 목포에서 1946년 초, 동·서양화는 물
    론 조각·공예분과까지 포함한 [목포미술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허건·김정현·문원 등 회원
    들이 측후동에 [목포미술원]을 열고 수묵·채색화 뿐 아니라 석고소묘 수채 유화 등을 지도하며
    9월에는 첫 발표전을 갖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달 앞서 8월에는 [녹영회](綠影會)가 예술신문 목포지사 후원으로 목포여중 강당에서
    창립전을 가졌는데, 백영수의 누드화 때문에 예술성과 음란성 여부로 지상논쟁까지 일어나 새
    로운 예술형식과 기존 문화관습 사이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해방이후 남도화단

    1940년대 후반은 해방 후 광주전남 미술계에서도 화단이라는 것이 갓 형성되기 시작하는 과도
    기였다. 1946년 [목포미술동맹] 결성을 계기로 한 전남 첫 미술모임 [목포미술원]의 발족과
    [녹영회] [황우회] 등의 단체전, 그 해 9월 개교한 조선대학교 문예학부 미술과의 개설에 이은
    김보현과 이듬해 오지호의 부임 및 [광주미술연구회]결성, 이 무렵 배동신 백영수 오지호의 개
    인전 등이 이어지면서 미술인 사이에도 연결이 시작되었다.
    특히 고향에 돌아 온 뒤 남도의 풍토와 정서 속에서 민족주의 회화론을 구체화시키면서 후진양
    성과 작품활동을 본격화하게 된 오지호는 초기 화단의 실질적 종주역할을 하였다.

    1947년 광주미술계는 주목할만한 해다. 이 해 4월에 배동신 등 전남여고 교사들 중심의 광주 첫
    서양화가 모임인 [황우회]가 발족되어 다음 달 광주여고 강당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그러나 회원들의 근무지 변동 등으로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이어 6월에는 조선대 김보현 교수를 회장으로 [광주미술연구회]가 창립되어 여자모델을 구해
    공동작업을 하며 이듬해 발표전을 준비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오지호의 귀향과 함께 강
    용운 등 10여명으로 재결성되었으나 역시 전시회 한번 갖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또 전라남도 학무국 주최 [새교육전람회]가 중앙국민학교 강당에서 크게 열려 미술교사와 학생
    들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었다. 그리고 `46년 11월에 결성된 [조선미술동맹](부위원장 오지호)의
    광주지부전이 `47년 9월 중앙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서양화의 오지호 김보현 등을 비롯한 수채화 동양화 조각 공예 다섯 분야에 모두 32명 64점이
    출품되었는데 실제로는 이념 노선과 거리가 먼 미술인들의 종합전시였다.
    이 무렵 서양화 개인전들도 시작된다. 그 첫 전시로 광주서중 교사이던 배동신이 `46년 10월 광
    주도서관에서 유화 수채화들을 선보였고, `48년 10월에는 [광주미술연구회] 주최, 호남신문사
    후원으로 광주금융조합2층에서 오지호 첫 개인전이 열려 한국적 정서와 자연색광을 담은 인상
    파적인 작품들을 발표하였고, 김보현도 목포에 내려가 개인전을 열었다.
    또 `50년 4월 광주 미국공보원에서는 강용운의 첫 발표전이 열렸는데 파격적인 강열한 색채와
    붓 터치들로 단순 변형시킨 반추상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런 초창기 화단활동은 갑작스런 한국전쟁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전란 중인 `50년 11월 강용운을 단장으로 종군화가단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백양사 계곡의 진
    지를 답사한 뒤 제작한 스케치와 전쟁화로 연말에 미국공보원에서 홍보전을 갖기도 하였다.

    아무튼 해방 이후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남도 서양화단은 대부분 일본 유학파들의 활동이 주를
    이루고, `46년 가을 문을 연 조선대학교 미술학과의 후진양성과 함께 `52년 [전국학생미술공모
    전](중앙초등학교 강당) 개최 등 남도화단의 바탕을 다져 나갔다.
    비로소 해방 이후 다양한 표현양식과 화법의 서양화들이 계속 발표되면서 한국화 일변도의 화
    단에 새로운 변화가 일게 된 것이다.



    전후세대 등장과 출신학교별 인맥의 형성

    1950년대 이후 남도화단은 조선대학교와 광주사범학교, 사범대학 등이 배출한 신예작가들로 인
    적자원이 늘면서 더욱 활성화되어 갔다.
    `46년 9월에 개강한 조선대학교 문예학부 예술과에서 `49년 3년제 전문부 첫 졸업생으로 김영태
    나점석 등이 배출되었고, 김영태는 `51년 학부과정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뒤 오승우(6회) 국용현 박남재 진양욱(이상 9회) 박석규(12회) 김종수 김재형 양영남(13회)
    송용 홍진삼(14회) 명창준 이태길 황영성(15회) 이두헌 최강희 최영훈(18회) 등 졸업생들이 호
    남과 중앙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토착정서와 미의식에 바탕을 둔 구상회화계열로 이른
    바 조선대 학파를 이루어 갔다.

    한편 1938년 3월 개교했던 광주사범학교는 1949년 전남여고에서 강용운이 옮겨오면서 지역 미
    술계의 또다른 산실로 자리하여 신예작가들을 적지 않게 배출하였다.
    `56년에 문을 연 광주사범대학(`62년부터 교육대학)으로 강용운이 옮겨가고 후임으로 양수아가
    자리를 이으면서 사범학교는 주로 추상미술 학파를 이어갔다. 정영열 박남(`54년) 최종섭(`57년
    ) 황영성 이태길(`59년) 우제길(`61년) 최재창(`62년)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그리고 사범대학에서는 박상섭 명창준 등이 초기 졸업생이었고, 같은 시기 홍익대에서는 오승
    윤(`60년 졸업) 김용복 최쌍중(`62년) 김종일(`65년), 서라벌예대에서는 임병규(`62년) 박동인
    배동환(`63년) 등이 회화수업을 닦았다.

    한편, 전후세대들의 전격적인 등단 가운데 목포에서 `58년 8월 [십대전(十代展)] 창립전이 있
    다. 서울대의 정승주를 비롯 홍익대와 목포사범 조선대 등 당시 목포출신 미술대학생 또는 졸업
    생들이 참여하였는데 비정형추상(앵포르멜)부터 반추상 또는 표현성 강한 구상화까지 다양한
    화풍들로 당시 미술계의 시대흐름을 보여주었다. 당시 [목포일보]에는 ‘목포화단의 침체와 타
    협의 감염을 회피하고...

    20세기 후반기의 대표적 세계미술사조인 신구상과 비구상이란 혁명적인 미술운동 등 세계미술
    의 축도(縮圖)를 미숙하나마 엿볼 수 있었다’는 비평이 실리기도 했다.
    이들은 매년 두 차례씩 발표전을 가지며 `61년 초 제6회전부터는 [네오 라르(Neo L'art)]로 이
    름을 바꿔 `63년까지 8회전을 가졌다.
    그 뒤 정승주 김암기 등 목포의 일부 회원과 국용현 진양욱 황영성 등 20여명 양인옥을 회장으
    로 `64년 말 [야우회(野牛會)]라는 구상회화단체를 결성, 이듬해 1월 창립전을 갖고 목포와 광
    주를 번갈아 가며 전시회를 갖다가 `67년 3회전을 끝으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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