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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서양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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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 추상회화와 자연주의 구상회화의 양립


    동-서양화 추상미술의 뿌리

    추상미술이 서양 현대미술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것은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개성과 실험정신이 시대를 선도하는 가운데 여러 새롭고 다양한 개념이나 양식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며 주류를 이루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ㆍ서 모두 고대미술에서부터 추상미술의 시원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시대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듯한 상징부호나 기하학적 도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가령 우주원리와 운행을 담고 있다는 팔괘나, 하늘ㆍ땅ㆍ 번개 등을 상징하는 각종 부호와 도상들, 울주 천전리나 고령 양전동 암각화의 무수히 반복되는 동심원ㆍ마름모꼴 등 형태들, 이집트 고대왕조의 엄격하게 절제된 기하학적 구조체들과 상징도상 같은 예들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추상미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10년대부터다. 그 선도자인 칸딘스키(Kandinsky.W, 1866~1944)는 이 무렵 비물질적 정신세계를 쫓아 정신적 추상을 지향하면서『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라는 개념을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미술사가 보링거(Worringer.W, 1881~1965)는『추상과 감정이입』(1908)이라는 책을 통해 추상과 구상의 배경을 그 지역의 독특한 자연조건이나 문화풍토 또는 정서와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하였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에 대해 범신론적 긍정적인 친화감이 강할 경우 대상에 자기감정을 불어넣어(감정이입) 그 자연형상을 고스란히 담아내려고 하는데 비해, 만일 외부 현상들에 대해 내적 억압과 불안을 느끼고 정서적 교감을 나누지 못할 때는 추상충동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보링거의 견해는 기본 심성이나 의식, 생활관습 모든 면에서 자연과 가까이 어우러질 수 있는 친화감이 바탕이 된 남도의 전통 남화나 자연주의 인상화법 같은 지역화풍의 형성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치가 강조한 ‘작대기 산수’처럼 외적인 형태나 군더더기 감정과 기교를 털어 버리고 오직 대상의 본체만을 간결하게 함축시켜내고자 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곧 인간이성의 지적 성찰과 분석이 중심이 된 서양의 추상개념과는 다른 정신적 직관과 감성적 교감에 의한 핵심요체의 표현을 이른 말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서구미술에서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모더니즘의 대표 형식으로 시대를 주름잡고 후반부에는 다시 그 틀에서 벗어나려는 비정형 추상?비구상이 유행하지만 이 또한 이성의 굴레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하지 못한 몸부림이라 여겨진다.

    아무튼 한국은 물론 남도의 현대미술은 대부분 자연순응과 정감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 구상미술이 압도적이면서, 한편으로는 동양예술의 본래 핵심인 추상이 오히려 역수입되어 들어와 정서적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지역화단의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남도 추상미술의 선도자-강용운과 양수아

    지역 화단에서 실질적인 추상미술의 토대를 닦은 이는 강용운과 양수아다. 이 가운데 강용운은 훨씬 일찍부터 실험적인 형식미의 탐구로 추상미술의 길을 닦아왔다. 그는 국내화단에 전위적 열풍을 불러일으킨 1950년대 말의 중앙화단의 앵포르멜(Informel)운동보다 10여 년 전부터 비정형의 반추상 형식을 선보인 선도자이다. 이미 `40년대 중반부터 형태의 과감한 단순변형과 검은 선 또는 주제의 이미지를 함축시켜낸 원색조의 화면, 자유로운 선들로 추상이라는 현대적 조형성을 모색하고 있었고 조선일보사가 `57년부터 주최한 [현대작가 초대전]에 양수아 보다 한해 앞서 `58년부터 참여하기도 하였다.

    남도회화의 자연주의 전통 속에서 적극적으로 현대미술을 추구해 온 강용운은 1921년 화순에서 태어나 1939년 18세 때 일본에 건너가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시절부터 현대미술의 신조형 형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3학년 때 프랑스 유학파출신으로 일본 추상미술작가이던 가와구치 기가이(川口軌外)로부터 현대적 조형세계를 지도 받기도 하였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43년 귀국한 뒤 광주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47년 전남여고 미술교사를 맡으면서부터다. 그 해 6월에 도 학무국이 주최한 [새교육전람회](중앙국민학교 강당)를 시작으로, `49년 광주사범학교로 자리를 옮긴 뒤 계속해서 반추상형식의 작품들을 발표함으로써 추상작가로서의 입지를 앞서 다져나갔다.

    초창기부터 그는 단순 형태변형과 주관화된 화면형식으로 반자연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광주사범학교를 거점으로 지역미술계의 또다른 화맥을 일구어 나갔다. 1950년에 가진 첫 개인전(4.10~17, 광주 미국공보원) 때 36점 가운데 20여 점이 반추상 또는 비구상으로, 야수파와도 같은 거친 붓질에 의한 형상의 단순변형이나 파기, 두터운 화면질감, 자유롭게 풀어낸 밝은 색조 등이 특징이었다. 이후 `54년(9.20~9.25, 미국공보원)과 `57년(10.1~10.7, Y살롱)의 개인전은 물론이고 `58년부터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에 참여할 무렵에는 전위미술운동의 주역인 전후세대들보다 훨씬 뚜렷한 비정형(앵포르멜) 회화들을 발표함으로써 선도적인 비구상작가로서 위치를 보여 주었다.

    합판 위에 빠른 붓질로 원색과 검정 필선들을 무수히 교차시킨 <부활>(`57), 기름종이에 흑갈색 무거운 색조들이 뭉개지고 흘러내리며 번뜩이는 흰 선들만이 곁들여진 <비(秘)>(`59), 적갈색 기름종이 위에 굵은 붓질 흔적들을 덧쌓으며 상형문자 같은 형상을 조형화시킨 <작품 64-A>(`64) 등 화면질감과 행위의 흔적이나 조형성을 동시에 추구하던 예이다. 이러한 비정형의 작품경향은 여러 시도와 함께 말년까지 계속되는데, 흰색바탕을 거의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 75-5>(`75)나 <승화(昇華)>(`76)같은 무채색 작품을 포함하여 <4월>(`68), <맥>(`86), <정기(精氣)>(`87) 연작 등 대체로 밝은 색조와 선을 많이 이용하면서 거기에 뿌리고 흘리거나 문질러 내기를 곁들이는 비정형 작품으로 일관하였다.

    한편 보성 겸백 출신인 양수아(梁秀雅, 1920~72)는 1932년 소학교 5학년 때부터 일본유학을 떠나 자유롭고 창의성을 중시하는 동경의 가와바다 화학교(川端 畵學校)에서 미술수업을 닦았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때인 `42년 징용을 피해 만주에서 신문기자생활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아 귀향하였다. `47년부터 목포사범학교를 잠시 거쳐 문태중?목포여중?목포여고 등의 교직생활과 함께 `53년부터는 ‘목포양화연구소’를 운영하며 목포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56년 호남 추상미술의 산실 광주사범학교로 강용운의 뒤를 이어 광주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작품세계를 열어 가게 되었다. `62년에 중앙로에 문을 연 양화연구소는 이 지역 현대미술의 주요작가들의 양성소이자 작업실이 되었다.

    그는 사실성, 감동과 함께 현대적 조형형식을 중요시 여겼다. 따라서 구상작품과 함께 거친 붓질에 원색조의 야수파계열 또는 입체파식 단순변형과 분할형태, 거친 필법 등의 반추상을 병행하였다. `53년 목포에서 첫 발표전이 있었지만 광주시절인 `56년 이후부터 더욱 비구상형식으로 변모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비정형 추상회화세계는 내적 기질이나 성향에서 강용운과는 또 다른 면을 보여 준다. 그 역시 현대미술의 새롭고 개성적인 표현양식을 추구하였으되 ‘현실에서 자유로 된다는 것은 가장 현실의 필연성을 통찰한 위에서’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설령 그의 천성이 ‘철저한 자유주의자요 낭만주의자’(이태)였을지라도 한국전쟁 때 남부군 정치부 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휴전 이후 굴절되어버린 삶의 무게와 깊은 앙금이 쌓여 침묵 속의 뜨거운 격정으로 차오르게 되었다.

    ‘위조지폐 구상화보다는 비구상화가 내 명함’이라며 비정형의 추상으로 일관하였을지라도 그 바탕은 단지 현대성이나 조형형식의 자유로운 확장과 파격을 탐구하였다기보다는 순수열정과 고뇌 갈등들이 뒤엉키고 응축된 무언의 외침이자 내적 발언의 형식이었던 것이다. 24차례의 개인전을 치르면서 `60년대 ‘백색에의 향수’시기를 지나 <잉태>(`69), 한지를 이용한 <작품>(`70~`72) 연작, <전화(戰禍)>(`72) 등 말년에 이를수록 속도감과 역동성이 더 강해진다. 그러나 끝내는 <상처 입은 자화상>(`69), <작품>(`72) 등 일련의 암울하고 일그러진 자전적 내면초상들을 거듭하다가 끝내 ‘역사의 격랑 속에서 낭만적 예술참여주의자’(이석우)로써 생의 바다에 침몰하고 말았다.



    실존의 고뇌인가, 예술의 순수 자유의지인가

    초창기 서양화단에서 광주 미국공보원(USIS)의 존재는 특별하다. `47년 4월 전남도청 앞 무덕전(후에 상무관) 뒤에 처음 문을 연 뒤 이듬해 제일극장자리에 있던 시립도서관으로, `49년에는 황금동(일제 때 요정 春木庵)으로 옮기면서 미국문화의 전초기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서구 현지와 직접적인 문화교류가 이어지지 못하던 당시 상황에서 미국문화를 중심으로 한 서구문화와 미술관련 자료제공 또는 간접적인 접촉창구로서 과도기 광주 현대미술의 전개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었다.

    1955년, 상무대 보병학교 장교로 광주에 머물고 있던 방근택이 광주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10.18~10.24)을 가졌다. 본래 철학도이던 그가 틈틈이 준비한 60여 점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이 가운데 표현주의에 가까운 추상화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한다. 본인은 한국미술에서 앵포르멜 순수추상작품의 첫 발표였다 하는데 이 전시회를 갖기까지 미국공보원 도서실에서 접촉한 [아트 뉴스(Art News)]나 [타임(Time)] [라이프(Life)] 등에 실린 서구미술 자료들이 큰 자극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대 후 서울에서 미술평론 활동을 펼치며 전후세대 앵포르멜 운동의 이론적 지원을 하게 되었다.

    `50년대 중반이면 추상표현주의가 잭슨 폴록(Pollock..J)ㆍ드 쿠닝(De Kooning.W)ㆍ죠르쥬 마튜(Mathieu.J)ㆍ프란쯔 클라인(Kline.F) 등에 의해 이미 당대 전위미술로 꽤 넓게 퍼져 있던 시기다. 그 같은 미국 미술계의 최근 소식과 비평, 원색 작품사진들이 여러 지면을 통해 소개되고 있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던 강용운과 박행남(박남) 등 지역 작가들에게 마치 현대미술의 신 지평인 것처럼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물론 강용운은 전후세대도 아니고 오히려 그들보다 몇 년 앞서 이 신미술 형식을 발표해 온 터였다. 또 기본적으로도 예술이란 ‘과거의 답습에서 벗어나 시대감각에 맞춰 자기세계로 이끄는 전위’이어야 한다며, 1960년 초 오지호(현대회화론-구상회화와 비구상회화에 대하여, 1960.1.7~1.18, 전남일보)와 그 유명한 추상미술 지상논쟁(현대회화론-그 사조의 의미와 금일의 예술, 1960.2.11~3.1, 전남일보)을 벌였다. 여기서 강용운은 ‘복잡한 현실과 불안한 시대를 극복하는데 무가치한 아카데미즘으로써 자연주의 보다, 외부의 물질관계를 무시함으로써 차라리 새로운 차원의 리얼리티를 획득하려 한다’며 생의 긴박감이나 내적 발언의 강화대신 현대라는 시대환경과 그에 걸 맞는 신조형 형식의 개발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아무튼 강용운과 양수아 문하의 광주사범학교 또는 1956년 별도로 분리된 광주사범대학은 오지호와 그 제자들의 구상계열 중심 축인 조선대학교와 마주 선 호남 추상미술의 산실이 되어 수많은 작가들을 배출하였다. 이 가운데 `54년 정영열 박행남(박남)과 `57년 최종섭 조옥순 등 `50년대 졸업생, 그리고 우제길(`61) 최재창(`62) 등도 이미 재학시절부터 비구상작품들을 제작하며 이후 추상화단의 주역들로 성장하였다. 사범학교 재학생이던 최재창과 김영길은 비구상으로는 이 지역 처음으로 `61년 [제10회 국전]에 입선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높아 가는 현대미술의 관심과 새로 배출되는 신예작가들을 통해 자연주의 회화 중심의 지역미술계에서 순수조형미와 현대성을 표방한 `63년의 [제1회 창작동인전]과 이듬해 [비구상 3인전], 그리고 [현대작가 에포크(Epoque)] 창립 등이 이어졌다. 아울러 정영열과 박남 처럼 `50년대 후반부터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 뒤 전후세대 현대미술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을 비롯한 추상미술 전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화단 내 입지를 다져 나간 경우도 있다.

    특히 광주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중앙대학교 교단에 서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정영열(鄭永烈, 1935~88)의 경우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추상미술의 흐름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예다. 초기 수업기의 구상형식 입문단계를 지나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전반까지 광풍처럼 몰아쳤던 앵포르멜운동에 적극 합류하였고, 이후 단색조 회화 등 동세대 문화흐름과 호흡을 함께 하였다. 그의 회화세계는 당시 국내 비정형추상의 경향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즉흥 행위성과 그 흔적이 강조되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보다는 질료의 표현효과에 비중을 두어 묵직한 깊이와 두터운 화면효과가 돋보이는 프랑스 앵포르멜 형식에 훨씬 가깝다. 당시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 또는 「파리비엔날레」(`65)ㆍ「상파울로비엔날레」(`67) 출품작들에서 나타나듯이 주로 암갈색조 또는 회갈색 등 단색 화면에 두터운 물감의 재질감을 살리면서 구멍 같은 반점들을 배열하거나, 짧고 두터운 붓질의 중첩 등 바탕의 매끄러운 여백과 대비시키는 마티에르 기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어 `60년대 말부터는 새롭게 화면형식의 변화를 시도하여 밝고 간결한 원색들이 많아지고 마름모꼴이나 원형 또는 十자형의 화면분할 등 기하학적 요소가 많은 ‘옵티컬 아트’(Optical Art) 시기를 잠시 거친다. 그리고 훨씬 표현흔적을 극소화시킨 ‘미니멀 아트’(Minimal Art)에 합류하여 백색이나 갈색조 단색 화면에 반점이나 텃치를 단순 반복하는 작품을 계속하다 `70년대 말 이후로는 한지에 색감이 조금씩 다른 투박한 한지펄프를 불규칙하게 배열하거나 구멍을 내는 ‘적멸(Nirvana)’ 연작으로 전통미감을 결합시키는데 주력하게 된다.



    시대양식이 된 단색조 미니멀리즘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까지 국내화단은 ‘단색조 회화’(Minimalism)가 풍미하던 시기다. `60년을 전후한 무렵에 격렬한 전위운동으로 화단을 뜨겁게 달궜던 앵포르멜 세대들이 청년기의 격한 감정을 삭히고 차가운 이성과 침묵의 공간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감각적 형식 못지 않게 미학적 개념을 중시하면서 신개념의 조형형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고 있던 서구 미술계는 물론 가까운 일본화단에서도 ‘모노화’라는 이름까지 얻으며 큰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상파울로 비엔날레ㆍ인도트리엔날레ㆍ카뉴국제회화제 같은 국제현대미술제 참여와 자료의 유입 같은 직간접적인 접촉과 자극이 많아지고, `70년부터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한국미술대상전]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78), 그리고 `74년부터 구상ㆍ비구상 부문을 분리하게 된 [국전] 등 여러 현대미술 무대를 통해 하나의 시대양식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런 단색조 중심의 표현형식 변화는 화단의 중견들로 성장하여 현대미술의 흐름을 타고 있던 이 지역 추상작가들에게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 구심점 역할은 역시 [현대작가 에뽀끄회]가 도맡고 있었다. 1973년, 창립10주년전(광주상공회의소)을 맞아 박상섭 최종섭 조옥순 장지원 김종일 김창선 최재창 유승우 정경숙 정희숙 등 회원 11명이 당시 국내 추상미술계를 주도하고 있던 김영주 박서보 김구림 서승원 정영열 조용익 최기원 최명영 하인두 하종현 등 현대미술작가 10인을 초청하여 합동전을 여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서울 명동화랑의 초대를 받아 서울에서 첫 단체발표의 기회를 갖는 등 대외적인 교류의 폭을 넓히는데도 힘을 쏟고 있었다.

    이어 `76년 가을에는 에뽀끄가 주축이 되어 지방에서는 처음인 [제1회 광주현대미술제](광주상공회의소 전시실)를 개최하여 지역 비구상미술에 기폭제가 되었다. 전남 10명, 서울 36명, 경기ㆍ충북 각 1명, 부산 3명, 경북 2명 등이 참여한 이 전시는 국내 비구상미술의 현주소를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한 자리에 모아 살펴보는 귀한 행사였다. 당시 에뽀끄의 작품성향은 이주호 배상하 등 정서적 배경이 다른 후배 청년작가들을 새로 영입하여 제2기 활동으로 전환하게 되는 `79년까지를 분기점으로 주로 흑과 백 등 무채색 단색조에 같은 표현요소의 단순 반복이나 대칭나열 등 절제된 화면구성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가령 최종섭(崔鍾燮, 1937~93)은 주로 포트리에(J.Fautrier)?타피에스(A. Tapies)같은 프랑스 앵포르멜 계통의 두터운 마띠에르와 불규칙한 비정형 형식의 `60년대 작품경향에서 전환하여 (`73)처럼 흰 바탕에 가느다란 직선과 곡선들만을 밀집선으로 배열하거나, `70년대 중반 연작처럼 하얀 화면바탕에 얇은 두께의 흰 반점들만을 반복 배열하여 백색의 평면성을 극대화하는 식의 지극히 단순화된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또 김종일(金鍾一)은 <사색의 구조> <작품> <흔적> 등의 연작을 통해 ‘동양적 사상의 근간을 이룬 「無」의 개념… 평면공간이 주는, 그리고 평면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안식감과 고요와 침묵의 명상, 즉 동양적 유현(幽玄)의 세계’(김종일 화집, 1988, 갤러리K)를 조형화 하는 작업에 천착하고 있었으며, 우제길(禹齊吉)은 앵포르멜의 거친 흔적이 간혹 나타나긴 하지만 옵티컬 아트의 연장이라 할 원색의 띠들이 무수하게 겹치며 층을 이루는 <리듬> <작품> 연작으로 이른바 ‘빛의 미학’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아울러 최재창은 캔바스를 뚫어 바가지를 붙인 뒤 무광 암흑색 바탕과 광택의 질감 차이만 있는 검정 페인트를 흘러내리게 하거나 검정화면에 짚을 이용한 단색조 화면을 선보이고, 박봉화는 여러 겹의 물감층을 덧쌓고 긁어내기를 반복하거나 골판지 같은 밀집 반복직선 위에 마름모꼴의 도형과 무수한 반점들을 결합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몇몇 작가들이 현대적 조형미의 세계에 몰두하긴 하지만 전통 남화나 구상회화에 비해 밑뿌리가 부실한 지역 추상화단의 현실과, 외래문화와의 접촉 빈도나 이론적 지원 또는 주변의 이해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지역미술계의 환경 때문에라도 개성을 앞세운 실험적 조형미와 창의성을 펼쳐 나가는데는 한계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회화세계나 조형세계를 탐구하는 추상미술이 모더니즘의 근본적 미학 이념이나 내적 형식논리의 체계화가 다져지지 못한 상태이다 보니 단지 형식미의 탐구 또는 외래양식의 모방 추종이라 비난받기도 했다. 이러한 지역정서나 내적 밑바탕이 부실한 상황에서 박상섭 명창준의 예처럼 초기 추상미술에 가담했다가 구상으로 전향한 경우들도 나오게 된다.



    꽃과 태양의 마을- 임직순

    남도화풍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는 자연주의 인상회화는 1961년 오지호의 후임으로 조선대학교와 연을 맺게 된 임직순(任直淳, 1921~96, 충북 괴산 생)의 가세로 더 한층 강렬한 원색의 향연, 이른 바 ‘빛과 색채’의 회화로 자리하게 되었다. 특히 임직순의 자전적 화문집(畵文集)인 「꽃과 태양의 마을」(경미문화사,`80)에서 그 구체적 접근을 찾아 볼 수 있다.

    ‘구상이란 결코 표피적인 사실주의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의 순수한 사고력을 기조로 한 진실된 표출의 구상을 말한다… 동양은 한마디로 형(形)의 구속감에서 초월해 있는 품위와 격조인 것이다… 외모의 아름다움에 가린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에 끌리기 때문이다… 빛과 색채가 만나는 싸움이며 이미지와 에스프리의 싸움이다. 싸움이라기 보다는 가장 열정적이고도 즐거운 교감일는지 모른다… 색이 아닌 빛… 감동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을 합하여 절충적인 작업… 지각의 빛과 공간의 형상… 지성이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다’

    임직순의 회화는 현장감흥을 중시하는 인상주의 회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형상의 단순화와 정열적 원색사용 등의 야수파 요소도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표현성면에서는 ‘귀족적인 품격으로 맑고 우아한 색채를 보여준다’며 존경했던 오지호의 회화보다 훨씬 대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회화세계 근간을 이루는 인상주의에 대해 앞의 책에서 ‘인상파 시대의 작품들 만치 서양미술사상 감상자들에게 진실한 즐거움을 주었던 시대도 없었다. 그들은 빈틈없는 사실주의를 통해서 자연을 대했던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추상(비구상)의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고정된 전통주의에서 벗어나 순수한 인간성으로 돌아가서 자연이 던져주는 아름다운 자태를 솔직한 심성으로 표현했던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초반의 갈색계열 중간색조를 점차 털어 내고 `70년대에 이르러 주관적 감정이입과 함축력이 무르익으면서 순도 높은 원색과 보색의 대비, 빛과 음영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특히 시시철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풍광과 꽃과 어우러진 여인을 주 소재로 삼아 거친 듯 하면서도 생기발랄하고 경쾌한 붓놀림, 강약을 실어 묻어나는 붓끝의 흔적과 촉각적 마티에르, 화사하면서도 깊이를 지닌 원색과 중간색 또는 보색의 어울림, 낱낱의 소재보다는 화면공간의 색채덩어리 배치를 위주로 한 형태의 생략과 변형 등이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70년대 미술계 안팎

    한편으로 오지호와 일본 유학파 출신, 임직순 등에게서 배출된 제자들이 화단의 중견들로 성장, 활동하게 되는 `70년대는 이른 바 ‘자연주의 인상화풍’을 특징으로 구상회화도 뚜렷한 성격을 내보이게 된다. 1970년 최용갑 손동 배동신 강동문 김수호 김영태 등을 중심으로 한 「황토회(黃土會)」 결성에 이어 `74년에는 김흥남 양인옥 국용현 정승주 오승윤 등을 주축으로 목우회 지부 성격의 「전목회(全木會)」가 조직되는데 뒤에 박상섭 김준호 김진열 등이 새로 가입하면서 「전우회(全友會)」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1978년 강연균 국중효 김용수 김재형 박동인 박복규 임병규 이사범 이정재 진원장 전해룡 최쌍중 최연섭 최영훈 홍진삼 황영성 등 「무등회(無等會)」의 창립은 그야말로 구상계열 중견작가들이 거의 망라된 남도회화의 구심체가 닻을 올린 셈이었다.

    이러한 모임 결성과는 별도로 `70년대 후반 들면서 중견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데, 이미 고착된 기존 화풍에서 탈피하여 시대감각을 곁들인 독자적 예술세계로 전환을 시도하는 예들이다. 이 가운데 `63년부터 조선대에 몸담아 온 진양욱(晋良旭, 1932~84)은 두텁게 덧쌓는 화면질감과 색면으로 풍경을 해석하고, <사랑의 빛>(`72)ㆍ<무상>(`74)ㆍ<양지>(`76)처럼 석조물 또는 건축적인 조형공간을 통한 구조적 조형성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를 토대로 <풍경>(`73)ㆍ<개간지>(`77)처럼 일정한 부피들을 지닌 원색면들의 조합으로 옮겨가는가 싶더니 `77년 12월부터 1년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교환교수와, `80년 6개월 간의 미국체류 시기를 거치면서 훨씬 밝은 원색과 부드러운 윤곽, 솜털 같은 질감처리로 환상적 풍경화의 세계를 펼쳐 보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69년부터 조선대 교수진으로 합류했던 황영성(黃榮性)도 초가의 토속미를 소재로 한 일련의 회색조 시골마을 풍경으로 독자적 세계를 열게 된다. 가령 <토방>(`71)ㆍ<온고>(`73)처럼 햇살 가득한 시골 초가의 정취를 투박한 화면질감으로 재구성하는가 하면, <마을>(`79)ㆍ<소>(`80) 등과 같이 시야는 점점 더 넓어지면서 훨씬 더 평면적이고 주관화된 단순변형으로 시골마을의 향토색을 담아내는데 주력한다.

    또 `74년 전남대 미술교육학과 개설 때 교수직을 맡게 된 오승윤(吳承潤) 역시 주로 향토색 짙은 전통 풍물이나 시골풍정을 토속적 정취로 담아내는 데 중심을 두고 있었다. 특히 `62년부터 연속 입ㆍ특선에 이어 <남해의 볕>(`76) 문공부장관상 수상으로 「국전」 추천작가에 오르기까지 「국전」ㆍ「도전」같은 공모전과 「목우회전」 출품 등 자연 풍정과 인물작업을 거듭하는데 `80년대 후반 이후 획기적 자기변신의 토대를 다져두는 셈이었다.

    아울러 고교시절 ‘청자회’ 활동시기부터 꾸준히 수채화를 다루어 온 강연균(姜連均)은 `75년 전남일보 기자직을 그만두고 작품활동에 전념하면서 삶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득한 서정과 현실적 리얼리티를 담아내는데 집중한다. <참빛 만드는 노인>(`74)ㆍ<우시장>(`78)처럼 수채의 맑고 투명하면서도 중첩되는 붓질을 통해 농축된 깊이를 담아내는 일련의 작업을 거쳐 <늙은 어부>(`79)ㆍ<탄광촌 설경>(`80)처럼 콘테 파스텔을 곁들인 독특한 질감의 시도를 통해 `80년대 일련의 흙 맛과 체취가 배인 또다른 수채화의 세계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선배들의 눈에 띄는 변화 노력들과 더불어 청년작가들 또한 <사다리회>ㆍ<라뚜르>(이상 `75년 창립)나 동기별 미술모임을 통해 동세대 간의 결속을 다지면서 지역미술계의 새로운 주역들로 성장해 나간다. 크게 보아 `70년대는 그 연륜만큼이나 농익은 전통 호남남화나, 우리 식의 미감으로 동질화된 자연교감의 인상주의 구상회화, 그리고 현대적 신감각의 조형형식을 모색하고 있던 추상회화까지 모두가 각각의 차이를 분명히 하며 원로 중견들의 활동이 고루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무렵에는 시대환경이나 사회현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순수미술론이 일반화되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단색조 회화든, 자연주의 구상회화든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수회화’ 아니면 ‘순수자연’으로의 경도는 미술 내적인 자연스런 흐름이자 남도인들의 천성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른바 나라 안팎의 어수선한 정세변화 속에 ‘유신ㆍ계엄정국’(연표 참조)이라 불리던 당시 국내 정치 사회현실의 영향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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